칼럼베껴쓰기

양간지풍(襄杆之風)

솔티22 2020. 5. 6. 14:22

  2005년 4월 5일 '천년고찰' 낙산사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전날 강원 양양군 임야를 태우고 남은 불씨가 낙산사 주변 소나무 숲으로 날아든 것이다. 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해 경내 목조건물이 대부분 전소됐고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기려 만들었다는 동종(보물 479호)이 녹아내렸다. 소방차마저 불타버렸다. 초속 32m의 양간지풍(襄杆之風)을 타고 번진 불길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낙산사를 삼켜버렸다.

 

  양간지풍은 봄철인 3~5월 양양과 고성(간성)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을 일컫는다. 양양과 강릉을 따서 양강(襄杆)지풍이라고도 한다. 남고북저(南高北低) 기압 배치로 부는 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으며 고온건조해지고, 산과 산 사이 좁은 지형을 지나며 속도가 빨라지고 사나워진다. 그 바람의 세기가 초속 20~30m로 작은 태풍에 버금가고 여기 올라탄 불티는 2k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간다.

 

  자고로 양간지풍을 화풍(火風)이라고 불렀다. 낙산사 화재에 앞서 1996년 4월 사흘 동안 강원 고성군 일대 3763ha를 태운 산불이 있었다. 바람의 세기는 초속 27m. 2000년 4월에는 고성군 군부대 소각장에서 발화한 불길이 9일 동안 강원 삼척 강릉 동해와 경북 울진까지 내려가며 동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더 거슬러 조선왕조실록 1804년(순조 4년)

3월 21일자에는 '강원 감사 신헌조가 이달 3일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크게 번졌는데,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에서 통천에 이르는 바닷가 여섯 고을에서 민가 2600여 호가 불에 타고 타죽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보고하니 순조가 놀라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명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일 발생한 고성 산불은 다행히 인명 피해 없이 12시간 만에 진화됐다. 지난해 4월 산불이 났던 곳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이번 불은 야산 인근 주택 보일러가 과열돼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밤새 불이 번질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예비 살수를 했고 동이 트자 소방헬기 39대, 소방차 500대를 투입해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진화를 했다. 지난해 고성 산불의 학습효과였다.

 

  발화 지점 가까이 저수지가 있어 물을 쉽게 끌어오고 수분을 머금은 수풀이 무성해 불길 잡기가 수월했던 것도 행운이다. 바람도 지난해 초속 30m보다 약한 초속 20m를 기록했다. 불씨를 키우는 건 강풍이지만 사람의 실수가 발화의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평소 화재를 감시하고 초기 진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재난이 반복되는데 바람 탓만 할 수는 없다.

 

2020.05.04(월) / 동아일보 / 우경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