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생뚱맞은 주적론
한국은 노무현 정권시절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 되살리려 해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적(primary enemy) 대신 가장 주요한 위협(primary threat) 등의 표현을 썼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우리가 주적이란 말을 쓰든 가장 주요한 위협이란 말을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은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주적이란 말을 쓰든 안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은 한국과 미국인 것은 변함없다.
10일은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이었다. 북한은 이날 주로 열병식을 개최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김정은이 열병식에 참가했다는 보도는 없고 국방발전전람회에 참가했다는 보도만 있어 열병식 대신 일종의 무기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지난달 시험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화성-8형) 등 최신 무기를 망라해 과시한 뒤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정책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등 특정한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는 주적론을 펼쳤다.
김정은의 이날 주적론은 생뚱맞은 측면이 있다. 우선 그날의 무기 과시 기조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김정은은 올 1월 당 대회에서만 해도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9개월 만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남북 대화, 북-미 대화 재개를 의식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주적은 전쟁 그 자체'란 말은 칼을 녹여 낫을 만드는 성인군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최소한 한반도 비핵화의 대의(大義)를 거슬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고도화를 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국방의 기본은 적이 전투기를 가지면 우리도 전투기를 갖고, 적이 미사일을 가지면 우리도 미사일을 갖는 것이다. 적보다 나은 전투기, 적보다 나은 미사일을 갖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만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해 보호받을 뿐이다. 미국이 100% 확실한 핵우산을 제공해주리라 믿는 맘편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다모클레스의 칼을 머리 위에 둔 불안감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주적이란 표현의 삭제가 평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한국이 핵무기 통제권을 얻어 남북이 서로에 대해 군사적 억제력을 확보한 위에서만 함께 뜻을 모아 전쟁 그 자체를 주적으로 삼는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2021.10.13(수) / 동아일보 / 송평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