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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 2024년 필리핀

솔티22 2024. 3. 18. 15:33

  "계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왜 우리는 그 많은 반도체를 한두 개 나라에서만 사야 하나. 이건 지정학이 아니라 집중화 문제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지난 12일 필리핀 마카티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서 한 발언이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기술통제를 강화하고 한국 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동남아 국가 투자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시계를 41년 전으로 돌려 보자. 집적 회로와 마이크로칩의 발명가이자 인텔 창업자인 로버트 노이스는 동업자 앤디 그로브에게 "한국인과 함께라면 그들이 일본보다 더 저가로 판매할 테니, 일본이 덤핑으로 세계 D램 시장을 독점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며 결국 일본의 칩 제조사들은 치명적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은 이런 계산속에서 삼성과 1980년대 반도체 합작투자에 참여한 미국 기업 중 하나가 됐다.

 

  1983년 2월 8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삼성은 반도체를 만들 것이며, 적어도 1억 달러를 쓸 것"이라고, 후일 '2·8 도쿄선언'으로 명명된 계획을 공개했다. 당시 D램 분야 선두 주자인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런 냉소를 극복하고 삼성이 D램 분야 세계 최고가 된 데는 초기 인텔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41년이 흐른 지금, 미국은 또 한 번 주요 반도체 생산시설 이전 방침을 세운 듯하다. 80년대 한국 반도체의 우군이던 미 인텔과 마이크론은 현재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바뀌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기로에 서 있다. 40년 전 일본처럼 'No(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취한다면 미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미리 낙담할 필요도 없다. 생산시설의 미국과 동남아 분산은 피할 수 없겠지만, 핵심기술을 지키며 생산시설 분산 과정에서 이익을 키울 수 있는 고차원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제2의 '2·8선언'이 절실하다.

 

2024.03.15(금) / 한국일보 /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