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어떻게 양산을 써?
영화 '타이타닉'에서 1등실에 탑승한 여주인공 로즈의 어머니를 비롯한 상류층 귀부인들의 복장은 한결같다. 우아한 원피스에 커다란 모자, 장갑, 그리고 한 손에 든 레이스가 달린 고급스러운 양산. 햇볕에 노출되지 않은 하얀 피부는 상류층 여성의 상징이었고, 양산은 이를 받쳐주는 장식품이었다. 지금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양산은 여성 전유물이란 고정관념이 단단히 박혀있다.
기록적 폭염이 이어진 9일 낮, 2km 남짓 거리를 버스로 왕복하는 동안 양산을 쓰고 지나는 시민들을 족히 200명가량 봤다. 이 중 남자는 딱 3명. 잠시도 그냥 서있기 힘들 정도의 따가운 뙤약볕에도 대부분의 남성들은 무방비다. 표준 기능을 갖춘 양산은 자외선 차단에 탁월한 효과를 낸다. 국가기술표준원은 대형 양산(살 길이 650mm 이상)의 경우 자외선차단율(UV)이 90% 이상이어야 표준 양산으로 인정한다. 체온도 낮춰준다. 외출 시 양산을 쓰면 체감온도가 최대 10도 낮아진다는 분석(서울연구원)이 있다.
옆 나라 일본은 폭염 대책 일환으로 남성 양산 보급에 매우 적극적이다. 환경성과 지방자치단체들이 나서서 2018년부터 '남성 양산 쓰기 운동'을 벌여왔다. 한 업체는 아예 2021년 '모든 남성이 양산을 갖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남성 전용 양산 브랜드를 론칭했다. 한 해 판매량이 40만 개를 넘는 등 인기를 얻자 지난해엔 유명 남자배우 오카다 마사키를 모델로 발탁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2023년 닛케이 산하 월간지 닛케이트렌디 히트상품 14위에 '남자 양산'이 올랐다.
서울 낮 최고기온이 7월 상순 기준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117년 만에 가장 높았고, 하루 온열질환자가 100명가량씩 속출한다. 이제 양산은 생존 필수품이다. "남자가 어떻게 양산을 써?"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버려야 한다. 수도권기상청이 7일 서울시와 경기도교육청에 "학생들이 하교할 때 양산을 쓰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잘한 결정이다. 어릴 때부터 남녀 불문 양산을 쓰기 시작하면 고정관념은 금세 깨진다. 우리도 남성 전용 양산 시장을 먼저 선점하는 업체가 나온다면, 성공 가능성이 꽤 높겠다 싶다.
2025.07.10(목) / 한국일보 / 이영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