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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의 심리

솔티22 2020. 3. 12. 14:16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주장한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잘못된 예측을 믿고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면 그 예측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머튼이 든 사례 중 하나는 건전한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뱅크런이 발생하는 경우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에서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군비가 확장되고 결국 우발적인 계기로 전쟁이 일어나고 마는 것도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이런 결과를 추동하는 결정적인 심리 기제는 '불안'과 '집단행동'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되면서 각국에서 사재기 바람이 일고 있다. 마스크는 나라마다 동이 났고, 화장실 휴지 등 생필품 매진도 허다하다. 화장실 휴지 사태의 발전 과정은 대체로 이렇다. 휴지 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사실과 거리가 먼 이 소문을 절대 믿지 않는 사람과 금세 믿는 사람은 각각 10% 정도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80%. 휴지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 10%가 슈퍼마켓으로 달려가고 그 바람에 휑하니 빈 마대를 본 80%가 흐름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에 휩싸여 집단행동에 나선다.


  영국 심리학자 스튜어트 서덜랜드는 '비합리성의 심리학'에서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다"면서도 "그러한 공포는 대부분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극장 같은 밀폐 공간에서 화재가 났을 때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다 더 큰 인명 피해를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권위적 존재"가 있으면 그런 공포는 줄어들 수 있다고 한다. 항공기 사고가 발생해도 공황 상태에 빠지는 승객이 적은 이유는 침착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승무원의 유도에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급 부족이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마스크 사태에서도 이런 불안 심리가 일부 작용한다. 감염병 대처에 권위적 존재인 질병관리본부장은 마스크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3부류를 꼽는다. 발열·호흡기 증상자, 의료기관 방문자, 다중 밀집 장소에 가는 고령·기저질환자다. 물론 마스크는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물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를 쓰고 구해 써야 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일회용 마스크라도 필요할 때 잠깐씩 사용했다면 며칠 써도 무방할 테고, 정 없다면 부직포로 간이 마스크를 만들어 쓰는 것도 불안을 더는 방법이다.


2020.03.12(목) / 한국일보 / 김범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