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베껴쓰기

보신각 종소리 사라진 제야

  시계가 없던 시절 종(鐘)소리는 사람들의 시간관념을 규율하는 역할을 했다. 도성의 백성들은 종각의 종소리를 듣고 통행금지('인정)와 통행 해제('바라') 시간을 가늠했다. 시보(時報)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묵은 해의 소멸과 새해의 탄생이 교차하는 섣달 그뭄 자정 하늘에 퍼지는 종소리는 마음 깊은 곳에 뭉클한 파장을 드리운다.

 

  조선 태조 이래 하루 두번 규칙적으로 울렸던 종각의 종소리가 민족 정신의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일제는 타종을 금지했다. 심훈이 저항시 '그날이 오면'에서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라며 광복의 염원을 표현했던 건 그런 연유다. 잠들었던 보신각 종이 다시 울린 건 미 군정기다. 미 군정은 1945년 12월 31일 보신각 종을 미국 독립기 '자유의 종'으로 비유한 타종행사를 가졌다. 미국은 이 종을 냉전시기 자유진영의 상징물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념해 1949년 8월 15일부터 보신각 앞에 시계를 설치하고 매일 하루 세 번씩 타종을 하기도 했으나 6·25로 중단된다.

 

  보신각 종을 33번 타종하는 제야행사는 전쟁 중 무너져 내렸던 종루가 재건된 1953년 시작됐다. 고관대작들만 참여하던 타종식에는 1986년부터 시민대표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서울 정도 600주년을 앞둔 1993년 제야에는 110명이 타종식에 참가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723명이 타종식에 참여했다. 보신각 타종행사가 국가적 의식으로 자리매김 하면서 행사 때마다 10만명 가까운 인파가 보신각 일대에 운집하는데 1994년 제야 행사 때는 흥분한 시민들이 광교 쪽 계단을 부수고 종루에 진입해 종을 치려다 부상자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보신각 타종행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보여 주는 역설적 사건이다.

 

  아쉽게도 올해 제야에는 보신각 타종행사가 열리지 않는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시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고려해 서울시가 1953년 이래 처음으로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대신 서울시는 사전에 영상을 제작해 31일 자정에 이를 송출한다고 한다. 아쉬운 대로 이를 감상하면서 코로나가 물러날 새해를 기원해 보는 건 어떨까.

 

2020.12.09(수) / 한국일보 / 이왕구 논설위원

'칼럼베껴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 무기 'LAWS'의 공포  (0) 2020.12.10
탄소세  (0) 2020.12.10
공공자가주택 실험  (0) 2020.12.09
국민의 힘 '박근혜 갈림길'  (0) 2020.12.08
코로나 V-day  (0) 202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