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베껴쓰기

1139채 '빌라왕'의 죽음

  10월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 장기 투숙 중이던 40대 김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김 씨는 무려 1139채의 빌라와 오피스텔을 보유한 '빌라왕'이었다. 그는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 방식으로 엄청난 규모의 빌라를 사들였다. 하지만 세입자 수백명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경찰의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김 씨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받아내기가 더 막막해졌다.

 

  전세를 얻을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는 확정일자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등기부등본을 살펴봐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면 세입자로서는 그 나름대로 철저하게 대책을 세운 셈이다. 김 씨는 62억 원의 세금을 체납한 상태였지만,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 200여 명은 보증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씨의 사망으로 상황이 복잡해졌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보험 가입자에게 먼저 보증금을 준 뒤 집주인에게 소송을 걸어 돈을 받아낸다. 그런데 집주인이 사망하고 상속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소송 대상이 없으므로 보증금도 지급하지 않는다. 보험에 든 세입자라도 상속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더욱이 보증보험 미가입자들은 살던 집이 경매를 통해 낙찰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어 사정이 더 딱하다.

 

  문제는 김 씨처럼 여러 채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빌라 3400여 채를 구입해 전세 사기를 벌이다

9월 구속된 권모 씨 일당은 '빌라의 신(神)'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권에 100채 이상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30명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 갭투자로 빌라를 매입했고, 정상적인 임대업자가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전세 사기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신축 빌라는 시세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젊은층이 적정가보다 비싸게 전세를 얻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하락하면서 빌라의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전국 평균 82.2%에 달한다.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깡통 전세'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 사기까지 판을 치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서민들이 늘어나게 된다. 엄중한 처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전세 계약을 맺기 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부터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빌라 전세 시장이 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2022.12.13(화) / 동아일보 / 장택동 논설위원

'칼럼베껴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살면 100만 원  (0) 2022.12.15
뜨는 K웹툰, 지는 日망가  (1) 2022.12.14
쿠바 대탈출과 트럼프  (0) 2022.12.13
'역대 최고 영화'가 의미하는 것  (0) 2022.12.12
과이불개(過而不改)  (1) 202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