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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베껴쓰기

임신부 미끄러진 휘발유에 태연히 불 댕긴 지하철 방화범

  임신부는 지하철 열차 바닥에 넘어지면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샌들 두 짝도 모두 벗겨졌다. 몇 초 전만 해도 임신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그였다. 주변의 비명 소리에 황급히 발걸음을 떼다 바닥에 흥건하던 휘발유에 미끄러졌다. 쓰러진 임신부 뒤로 4, 5m의 

'휘발유 길'이 나 있었다. 그 끝에 한 60대 남성이 있었다. 그는 뿌려놓은 휘발유 위로 불붙인 옷을 던졌다. 시뻘건 불길이 순식간에 뻗어 나가 샌들과 휴대폰을 집어삼켰다. 임신부가 맨발로 일어나 피한 지 2, 3초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달 31일 방화 사건이 난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폐쇄회로(CC)TV에 담긴 당시 상황이다. 토요일 아침이던 그 시각 승객들은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거나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화범 원모 씨가 가방에서 노란 휘발유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을 때 이를 알아본 승객은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익숙한 일상 공간에서 난데없이 휘발유가 흩뿌려졌고 이내 불길이 치솟았다.

 

  "이혼 소송 결과에 화가 나 공론화시키고 싶었다"는 게 원 씨가 밝힌 방화 이유다. 사회적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이 많은 폐쇄 공간인 지하철을 고른 것이다. 자신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신변 정리도 미리 해놨다. 범행 후 열차에 쓰러져 있던 원 씨는 승객들 도움으로 구조됐는데 손에 그을음이 많은 걸 유심히 본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항의하는 승객에게 그는 "안 죽었잖아"라고 태연히 답했다고 한다.

 

  그는 8량인 지하철 열차 가운데인 4번 칸에 불을 질렀다. 불과 연기는 양쪽으로 번져 나갔다. CCTV에는 승객들이 혼비백산하며

4번 칸에서부터 옆 칸으로 옮겨가 1번 칸에 가득 모인 상태에서 시커먼 연기가 덮쳐 오는 장면도 있다. 불을 낸 시점도 열차가 깊은 지하터널 구간을 지날 때였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열차 내장재가 불에 안 타는 소재로 바뀌었고, 승객들이 침착하게 비상 개폐장치로 문을 연 뒤 어두운 선로를 따라 줄을 서서 대피하는 등 현명하게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대형 참사로 번질 뻔했다.

 

  검찰은 원 씨를 기소하며 방화와 함께 승객 160명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192명이 희생된 대구 지하철 사건에선 살인죄가 아닌 방화치사죄로 범인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땐 불을 붙이려던 범인에게 승객들이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다 '펑' 소리와 함께 불바다가 돼 살인의 고의까지 인정되진 않았다. 이번 사건은 다르다. 원 씨는 승객들을 향해 휘발유를 뿌리고 임신부가 넘어져 있는데도 불을 질렀다. 승객들이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법원 판결이 확실한 교훈을 남겨야 한다.

 

2025.06.27(금) / 동아일보 / 신광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