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면서 신생 독립국이 된 카자흐스탄은 난데없는 핵무기 강국이 됐다. 소련이 연방 극가에 분산 배치했던 핵무기의 소유권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세계 4대 핵무기 보유국이 된 카자흐스탄은 당시 전략 핵무기 1410개, 대륙간탄도미사일 104기를 보유했고, 대량의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 등 핵물질도 갖고 있었다. 소련 시절 한적한 변방국가가 핵무기의 '화약고'로 급변한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신속하게 비핵화의 결단을 내렸다. 핵 대신 경제 발전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소련이 카자흐스탄 땅에서 450회 이상 실시한 핵.수소폭탄 실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배핵화 열망도 강안됐다. 이후 핵무기는 러시아에 넘겨서 폐기 절차를 밟았고, 그 대가로 미국은 '넌-루거 프로그램'을 통해 16억 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을 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비핵지대화 창설을 주도하면서 경제 부흥에 성공했다. 그래서 비핵화의 성공 모델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국빈 방문 중인 카자흐스탄을 '모범적인 비핵화 국가'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창하는 '리비아 모델'에 선을 그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리비아는 핵물질을 2004년에 미국에 넘겼고, 경제 지원 등 보상은 이보다 2년 뒤에 이뤄졌다. 미국이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에 제안한 비핵화 완료와 동시에 제재 해제 및 보상이 이뤄지는 '일괄타결'방식과 비슷하다.
카자흐스탄이나 리비아 모델 모두 북한 핵 문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얼떨결에 소련의 핵무기를 넘겨받은 카자흐스탄과 달리 북한은 핵무기를 직접 개발했다. 핵 개발에 수십 년이 걸렸고 그 수준도 상당히 고도화됐다. 게다가 카자흐스탄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 넘겨받은 핵무기를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2014년 러시아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리비아 모델에 대해선 북한은 더 예민하게 거부감을 표한다. 북한은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결정적 이유가 핵 포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포기=체제 붕괴'라는 생각이 강하다. 김정은이 유독 핵 능력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카자흐스탄 비핵화를 주도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은 평소 북-미 대화의 중재자 역할을 맡겠다고 말해 왔다. 카자흐스탄 모델을 토대로 '핵 대신 경제'비전을 설명하겠다는 얘기다. 김일성부터 3대에 걸쳐 가까스로 '핵보검'을 거머쥔 김정은이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일지는 모르겠지만.
2019.04.23(화) / 동아일보 / 정연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