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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베껴쓰기

폐지 분리

  지금 사는 아파트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일이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다. 출근 시간을 고려하면 목요일밤, 혹은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 술자리는 몹시 부담된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기 어렵고 그래서 분리수거에 실패하면 일주일 동안 잔소리에 시달려야 한다. 재활용 쓰레기가 쌓이는 명절 시즌엔 특히 더하다. 가만 보니 대부분 남자들이 비슷한 형편인 듯하다. 술자리를 평소보다 일찍 박차고 일어서면 '오늘이 분리수거일인 게지' 짐작한다.


  분리수거를 하는 모양새를 보면 사람 성격을 알 수 있다. 종이·플라스틱·비닐·캔·병 등으로 미리 분리해 와서 바로 해당 박스에 넣는 '모범생'이 있고 현장에서 주섬주섬 분리하는 사람도 있다. 현장 분리는 아무래도 정확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플라스틱과 비닐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 가장 큰 부피와 중량을 차지하는 폐지는 집에서도 따로 분리하기 때문에 헷갈릴 일이 없다.


  서울 아파트 60%를 책임지는 재활용 쓰레기 수거 업체가 폐지에 이물질이 많이 섞인다는 이유로 서울시에 "상황 개선이 없으면 수거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폐지는 대부분 중국이 수입하는데 환경 보호 문제로 최근 수입이 크게 줄었다. 또 국산 폐지들은 비닐·은박지·스티로폼 등 이물질이 많이 포함돼 있어 이걸 다시 분리하려면 추가 비용이 든다. 돈이 되지 않으니 수거 업체가 이걸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어릴 때 폐지는 엿과 바꿔 먹기 좋은 품목이었다. 하루는 엿장수가 보이기에 폐지는 없고 해서 책 몇 권과 바꿔 먹었다. 한참 지나 "책이 몇 권 안 보인다"고 하는 아버지에게 시효는 끝났다 생각하고 웃는 얼굴로 이실직고한 것이 아닌가. 혼이 났다. 지금은 엿장수도 없고 폐지 값을 쳐 주지도 않는 시대다. 수거 업체가 가져가게 하려면 알뜰히 잘 분리하는 수밖에 없다. 분리수거일엔 술 약속을 잡지 말자.


2020.02.12(수) / 매일경제 /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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